안녕하세요. 캬라멜 팀블로그 한겨울입니다.
이번에 작업중인 소설을 여기에 한 두편씩 게재를 하고자 합니다.
다소 부끄럽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으시겠지만, 그래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제목은 유실물 보관소, 화수는 2편입니다.
02
지훈은 그렇게 한동안 정체모를 노인이 건네준 알약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자 시간은 오후 2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제의 그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훈만의 고집이었고, 그 고집만큼은 꺾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점에서, 쓸모없이 전화를 두 번이나 받은 것은 의외일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채화도 그것에 대해 지적을 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별일이네요. 지훈씨가 그런 전화를 받아서 기록까지 하다니.."
".. 저는 당신의 머리 속에서 얼마나 절망적인 캐릭터인겁니까? 저도 나름 의사입니다."
그렇게 이틀 사이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사람들과 계속해서 마주한다는 것은 당황이라기보다, 늘 익숙한 현상을 깨어주는 신선함과도 같았다. 늘 챗바퀴처럼 돌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된 것 같은 기분도 조금은 들었다. 그것은 학계에서 말하는 인생의 개혁이자 터닝 포인트라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갑자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언제까지나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두려워합니다. 그런 이중적인 마음이 결국 보수와 진보라는 사상을 낳고, 현상유지와 개혁이라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인간관계의 이른바 '밀당'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과거 대학교에서 심리학 공부를 할 때 교수가 해주었던 우스갯 소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훈에게는 그것이 왠지모르게 마음에 와닿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두려워하는 마음도 이미 경험했을 터였다. 지훈에게는 그런 과거가 있었다. 과거의 회상은 언제나 지훈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갔다. 가끔씩은 그 상처의 아픔이 일상 생활 자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정신이 아찔하고 욱신거리며, 정신이 혼미할 정도여서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되내기던 중 채화로부터 다음 손님이 들어간다는 신호를 받았다. 지훈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와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조금이나마 풀린 긴장을 다시 다잡으며 얼굴을 양손으로 세게 쳤다. 마침내 병실의 문이 열렸다.
"..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리와서 앉으시죠."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두 사람이었다. 원래 정신과 상담은 거의 한 사람과 1:1로 상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사춘기 시절을 겪는 불량 청소년은 부모님이나 교사와 함께 오는 경우가 있고, 불우한 성폭행 경험자들은 부모님과 같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예외에 해당했다. 두 사람은 모두 여자였다. 한 명은 검은색의 스웨터에 갈색 스커트, 그리고 검은색 자켓과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동년배로 보이는 또 한명의 여성은 반대로 흰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확연한 대조, 그리고 2명이 동시에 들어오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예외였기에 지훈에게도 낯선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되었든 지훈에게는 상담의라는 일이 있었다.
"네, 두 분 중 어느 분이 상담을 받으러 오신건가요?"
"네. 상담을 받으실 분은 이 분이십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고갈 부분인데, 동석해도 괜찮으신가요?"
"....."
상담을 받을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흰 옷을 입은 여자를 가리켰기 때문에, 확실하게 정해졌으나 어찌된 일인지 흰색의 옷을 입은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 표정은 굉장히 무뚝뚝하고 시선은 조금은 멀어진 듯이 동공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선생님. 이 분은 한국이름으로는 한예설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25살, 외국의 K대학교를 졸업하셨고 신체사이즈는.."
"저.. 저기.. 그건 굳이 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네. 그런것이군요. 이해했습니다. 후훗."
"아.. 네.. 하하하.."
"제 이름은 김나현입니다. 나이는 25살, 참고로 처ㄴ.."
"아! 괜찮습니다. 더 설명 해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하.. 그럼 상담을 시작해볼게요. 한예설씨? 무슨 일 때문에 오신건가요?"
"....."
한예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의 동공은 여전히 조금 풀린 채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의식 속에 지훈의 존재는 있지 않았다. 전혀 진심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야기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지,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뭔가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는 각오를 일관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처음부터 바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도를 하려는 사람의 눈과는 분명 달랐다. 지훈은 스스로 엄청난 적을 만난 것처럼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적막이 지속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에.. 제가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군요!"
"네? 그게 무엇인가요?"
"네. 주인님은 말을 하시질 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실어증이십니다."
"그럼 그걸 먼저 이야기하세요!!"
이제야 지훈은 사태 파악이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김나현이라고 하는 여자는 한예설이라는 이 흰색의 여자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집사나 메이드에 가까운 인물이며, 한예설은 현재 실어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인물이기에, 그의 후견인으로 이 곳에 당도한 것일 터였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 때 전화를 걸어 왔던 사람도 아마 이 검은색의 여자였을 것이다. 그 때는 분명히 약간은 목소리가 떨리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대면을 하고 나니 전혀 그런 이미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상담을 받으러 온 마냥 입술이 계속 달싹거리는 것이 보였다.
"언제부터 실어증이 오신거죠?"
"네. 주인님은 정확하게 18년 17개월 3시간 16분 전.."
"그냥 나이를 말하세요!"
"쳇.. 7살부터 말을 하시질 않았습니다."
'지금 혀를 찼어?.. 무슨 이런 여자가..'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요? 7살부터?"
"네. 제가 늘 곁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이건 실어증이라고 볼 수 없었다. 실어증을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현상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실 실어증의 결정적인 원인을 정신적 충격으로만 볼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실어증도 뇌의 언어적 중추가 기질적인 손상을 입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즉, 뇌의 직접적 손상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실어증이 10여년간 지속될리 만무했다. 실어증은 그런 기나긴 세월의 치료를 요하는 증상은 아니다. 우선은 사전적인 정보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7살 무렵, 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건가요?"
"네. 매우 큰 사고였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사를 오고갈 수준이었어요.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피를 많이 흘리셨는데, 당시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진 것이에요. 하지만 그 뒤로 깨어나셨지만 말이 없으셔서.."
"당시 집도했던 의사는 무슨 진단을 내렸었나요?"
"뇌의 손상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판단해서, 각종 치료를 진행했지만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어요."
"그렇군요."
지훈은 곰곰히 고민했다. 실어증은 분명 해결이 되었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려내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운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곳에는 헌신적이고도 높은 수준의 의료진이 같이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수한 의사였을 것이고, 적어도 실어증의 치료를 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치료를 진행했을 것이고, 나아가 실어증은 매우 빠른 속도로 치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흰색의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17년에 가까운 그 세월을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례적인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의사소통을 '언어'로 진행한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한 것인가?
"그러면 그동안 의사소통은 어떻게.."
"수화를 해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거절하셔서요. 이건.. 조금 부끄럽지만...."
"말씀해주세요."
"그..그게.. 저는 주인님과 마음이 이어져있으니까요. 일종의 텔레파시? 데헷"
'... 정작 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인 것 같은데..'
"흠흠 실례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는 주인님의 눈이나 행동을 보면 대체로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그걸로 그동안은 해결해왔습니다."
적어도 수화를 거절했다는 것은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말을 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고를 당한 나이가 너무나도 어렸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희귀한 것이다. 하물며 7살의 어린 여자아이가 사고를 당한 직후에 그 무서움과 고독에 몸서리 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물며 그것을 참고 17년간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학계에서 공부를 할 때도 이런 사례는 본 기억이 없었다. 지훈에게는 정말 새로운 흥미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저를 통해서 해결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선생님. 우리 주인님이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언어 기능의 회복 치료는 지금까지 받아온 것인가요?"
"주인님의 가문은 G그룹의 회장님의 차녀이십니다. 그동안 수많은 세계의 심리학 명의들을 모셔와 지속적인 치료를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훈도 알고 있었다. G그룹은 이미 한국을 뛰어넘은 전 세계적인 기업이었다. 처음에는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그 범위를 점차 넓혀 가전제품과 자동차, 조선과 무역, 나중에는 스마트 계열 업종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다. 게다가 세계의 유명 기업과 브랜드들이 잠식한 시장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고, 특유의 독자적이고도 독특한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열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G그룹은 현재 한국이 아닌 전 세계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 대기업의 차녀가 17년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 물적으로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위치에서 태어난 그녀이며, 그것은 마치 신의 선택을 받은 위치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세계의 이름만 꺼내도 다 알만한 유명한 의사들을 초빙하여 치료를 전담시키는 것 정도는 우스울 정도의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했을 것이다. 치료도 지속적으로 받아왔을 것이고, 좋은 약도 모두 섭취하고 있을 터였다. 여차하면 뇌의 언어적인 중추역할을 하는 부위를 줄기세포로 배양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선생님. 제 신체사이즈가 궁금하신 것이라면.."
"아뇨! 그게 아니라!! 그정도의 그룹의 차녀시라면, 이미 굉장히 높은 수준의 치료를 받아오셨을텐데요. 굳이 이런 조그마한 개인 상담소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쳇.. 그거야.. 그.."
'또 혀를 찼어.. 이사람 도대체....'
바로 그 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 흡사 인형처럼 존재감을 잊고 있었던 흰색의 여자, 한예설은 나현의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나현은 그런 예설을 한동안 지긋이 바라봤다. 또 다시 상담실 내부는 적막이 흘렀다. 둘은 눈을 서로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나현의 말을 기초로 삼는다면 분명 저 행위는 어떠한 의사표시를 읽고 있는 행위일 것이다.
"휴.. 알겠습니다. 주인님도 참.."
"무슨 일이시죠?"
"사실대로 다 말을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사실은 주인님이 전부터 당신의 사진을 보고 계속 지목을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 사진이라니요?"
"일주일 전쯤 저는 한국의 심리학 저널을 읽고 있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그걸 주인님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돌아왔을 때 주인님은 계속 그 책에서 당신의 사진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그런 밝은 눈빛은 처음봤지만요. 그 뒤로 1주일동안 내내 그 사진만을 들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보니 대학병원에서 나와 개인상담실을 운영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주인님을 이 곳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그런 황당한 이유로.. 나를?...'
말을 하지 않던 그녀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을 사람의 사진을 알아보고 계속해서 재촉을 했다는 사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훈으로서는 이미 17년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 사실도 신비하기만 했지만, 그 원인을 듣고 보니 점점 더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상대방의 매혹같은 것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었다. 지훈에게는 잊혀진 것 같은, 흐물흐물한 자신의 과거에 잃어버린 것 같은 그 원천적인 호기심. 그리고 신선함 때문이었다. 지훈은 예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
'역시 말은 하지 않는건가.'
예설은 지훈의 악수를 받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악수가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는 물론 예설과 지훈, 모두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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