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캬라멜 팀블로그 한겨울입니다.
이번에 작업중인 소설을 여기에 한 두편씩 게재를 하고자 합니다.
다소 부끄럽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으시겠지만, 그래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제목은 유실물 보관소, 화수는 1편입니다.
01
"저는 결국 포기해야 되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요? 선생님."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신에게 '포기하지 마세요!' 라고 했었죠? 그 질문에 대해서."
"아.. 네.."
"저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라' 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나도 추상적이죠. 스스로도 이미 알고 계시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쯤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거에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런 질문이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어.. 그런 것 같아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라면 제대로 있지 않나요? 저와 이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그 역할까지도 맡고 계시니까요."
한적한 평일의 오후, 한동안 부산했던 상담실은 조금씩 안정감과 적적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상담의 학계에서도 꽤 높은 평가를 구가하고 있던 심리 전문상담의 백지훈이었다. 해외의 A 대학에서 의학코스를 논스톱으로 패스를 한 그의 스펙과 더불어 놀라울만큼 상대방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언변은 단연 그를 인기가 넘치는 상담의로 띄어놓았다. 그의 상담은 어디까지나 따뜻했고,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면을 갖고 있었다. 심리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부산함을 떠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정신과 상담이 이루어지는 병실은 늘 부산하고 긴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분위기를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잠재워, 환자를 지속적으로 안정시켜주는 그의 능력은 높이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상담을 받고자 예약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결국 그가 근무하던 B 대학병원의 같은 정신과 심리상담의들의 온갖 질투와 시기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이중적인 면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환자를 대할 때는 그렇게도 따뜻하고, 부드러울 수 없는 그런 좋은 사람이지만, 그의 동료들과는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식어버리며, 말조차 걸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가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때로는 '그저 말재간으로 인기를 얻는 이단'으로 치부하는 동료들까지 생겨났다. 결국 그는 자연스럽게 B 대학병원에서 밀려났고, 지금은 개인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럼 다음주에 한 번 더 방문해주세요. 그 때 한번 진전 척도를 재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예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에요."
"홀가분해지셨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 마음을 늘 유지하길 원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주세요."
지훈은 환자가 방문을 닫는 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분명 돈을 벌기 위해서 상담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상담의들을 멸시할 정도로 싫어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확실히 상담의로서의 인기는 부담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완연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을 기대한 상태로 상담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크게 낙담하는 환자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신과 상담의는 어디까지나 심리 분야로 상담을 해줄 뿐이었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신'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선생님. 이제 종료시간이 다되었어요. 정리할까요?"
"그래주세요. 항상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지훈이 B 대학병원에서 밀려날 무렵, B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유채화도 동시에 병원을 그만두었다. 지훈이 유일하게 대학병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는 바로 채화였다. 채화는 크게 사람들에게 눈에 띌 정도의 미모나 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항상 자기가 맡은 일은 야무지게 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훈은 그런 성격에 호감을 느껴 어렵지 않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동료들의 사랑도 한번에 받던 채화가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낸다고 했을 때 주위의 만류는 극심했다.
"채화씨!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뭐하러 저런 사람 때문에 간호사를 그만두는데?"
"그래 맞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응?"
"아뇨. 저는 그만둘거에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채화씨. 제가 그만둔다고 같이 그만두시는거라면 그만둬요."
"지훈씨, 당신 때문에 그만두는건 아니에요. 너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도대체 왜 제 상담실 앞에 와있는거죠?"
"저는 곧 실업자니까요. 다시 일을 찾아보려고 왔는데, 우.연.히.도 여기에 왔네요. 헤헤"
"상담실에 간호사는 필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채화는 기어코 대학병원에 사직서를 당당하게 제출했다. 그리고 곧바로 지훈의 개인 상담실에서 각종 매니저 역할을 시작했다. 카운터에서 진료를 접수하는 것부터 청소와 건물관리, 단골 고객에 대한 관리까지 전부 전담을 했다. 지훈은 극히 만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자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지 못할 정도로 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훈은 그동안 채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한번 결정한 것을 결코 되돌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채화씨. 저 때문에 이래저래 고생이 많네요."
"별말씀을요. 그럼 저 퇴근해볼게요. 내일 봐요!"
채화가 퇴근을 한 뒤 텅 빈 상담실을 한 번 빙 둘러본 지훈은 외투를 입고 문을 잠그기 위해 나섰다. 상담실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흔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 맞을 것이다. 문을 잠그기 위해 키를 넣는 순간 갑자기 상담실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완벽하게 마무리를 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틀어져버렸다고 판단한 지훈은 살짝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어 다시 상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 앞에 섰다.
'그러고보니 전화는 항상 채화씨가 받아왔었구나..'
"안녕하세요. 백지훈 상담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저기, 여보세요? 여보세요?"
"....."
'뭐야. 장난전화인가?'
지훈은 장난전화라고 판단하고 끊었다. 뭔가 찜찜한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다시 문을 잠그기 위해 밖으로 나와 키를 넣었다. 그런데 또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지훈은 아까 전의 장난전화라는 생각이 문득 들자 빈정이 상하면서 화가 났다. 홧김에 무시해버릴까라고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격식을 차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상담실로 들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백지훈 상담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그..."
"네? 잘 안들립니다. 조금만 크게 말씀해주세요."
"... 아.. 거기 상담하는.. 그런 곳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럼.. 저.. 지금 방문해도 되나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진료시간이 종료되었고, 내일 방문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럼 내일 방문할게요."
다른 여느 환자들과 비슷하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많이 표출하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카운터에서 예약리스트라고 씌여 있는 서류를 열었다. 예약은 다음 날 오후 3시까지 잡혀 있었다.
"네. 그럼 내일 오후 3시 20분에 방문해주세요."
"네- 그럼.."
"아! 잠시.. 이름을!!.."
지훈은 이미 끊어진 전화를 내려두었다. 이름을 묻지 않은 것에 대해 곧잘 후회했다. 지훈은 한동안 망설이더니 결국 예약리스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장난전화, 오후 3시 20분 예약'
다음 날, 지훈은 출근하자말자 채화에게 큰 소리를 얻어 먹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예약리스트에 적고 간 어제의 필기 때문이었다.
"장난전화가 뭐에요? 쓸거면 제대로 쓰셔야죠!"
"미안해요. 그게 이름을 못 물어봐서..."
"어휴.. 속터져서 정말. 내가 여기 취직 안했으면 어쩔뻔했어요? 도대체가.."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하하.."
지훈에게 있어 채화는 항상 야무지게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야무지다는 표현은 다시 말하자면 완벽에 가깝에 일을 마무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무리에 가깝다고 보일 정도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밤을 새서 야근을 했다. 작은 개인 상담실에서 무슨 야근이냐고 하겠냐만은, 그녀는 단호하게 일을 끝내야 하니 야근을 해야 겠다고 보고를 해왔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서 다음 날은 휴진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크게 화를 내는 채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정도로 채화는 일에서만큼은 확고했고, 또 분명하게 선을 그을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상담을 끝낸 뒤 다음 환자를 받은 지훈은 흠칫 놀랐다. 기묘하게 생기고 흰 수염이 길게 자란 노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노인들이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겪는 고질적인 우울증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시점마저도 이미 초월한 것 같이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노인이었다.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굉장히 단정하고 또 눈빛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상담이 필요한 환자들은 늘 눈빛이 흔들리고 부산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무슨 일로 오셨나요?"
"자네가 이 곳 의사인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고민이 하나 있어서 찾아왔다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내 고민을 해결해주지 못했어."
"그렇군요. 어떤 고민이신가요?"
"내가 평생을 사랑했던, 그리고 헌신했던 여자가 있다네. 그런데 그 여자가 나에게 이 말을 남기고 떠났네."
"어떤 말인가요?"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너를 붙잡을 수 있었을텐데..라고."
노인이 읊는 저 시조는 분명 일본에서 유명한 만연집의 한 구절이었다. 일본에서도 최초의 문학집으로서 가장 높은 가치를 매겨줄 수 있는 문학작품 중 하나였다.
지훈은 그 사실을 알고, 천천히 답가를 읊기 시작했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며,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주신다면 나는 머무를 것입니다."
".... 자네.."
"어르신. 이미 알고 계신 것이겠죠. 그 답가에 대해서도, 만연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요. 말씀하셨던 그 구절은 일본 만연집의 가사 중 하나입니다."
"... 젊은 사람이 만연집을 알고 있는겐가. 이거 놀랍구만. 허허.."
"저를 시험해보시려고 하신 것이라면 너무 지나치십니다. 어르신. 설마 그 여성분도 허구의 인물입니까?"
"그랬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네. 당시 나는 그 여자를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네.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곁에 있으면 반드시 상처를 입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그만두었다네. 점점 멀리하고 벽을 쌓아갔지. 그 때 나에게 그런 구절을 읊어주고 홀연히 떠나버렸더군. 그 당시의 나는 우둔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어. 하지만 결국은 알아냈지. 그것이 만연집에서 나오는 구절이라는 것을, 그리고 답가도 알게 되었다네."
"답가의 뜻을 해석한다면.. 결국 그 여성분은.."
"그래.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 여자는 내가 붙잡아주길 기다렸던걸세. 하지만 나는 붙잡질 않았네. 그리고 이렇게 후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네."
"어르신의 마음이 어느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안타깝습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던 내 화풀이에 가까운 이 질문의 답을 해주다니, 대단하구먼. 자네에게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지훈은 캡슐형의 모양을 가진 알약을 받았다. 그 알약이 무슨 알약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나름 대학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해보았던 지훈이었다. 그러나 처음보는 종류의 캡슐이었다.
"이 약은 무슨 약인가요? 어르신."
"자네의 상을 보니 근심이 많고 숨긴 것이 많으며, 자신을 가두어두는 상이구만. 안타깝네. 그 약은 자네의 그 아픈 마음을 치유해줄 것이야."
"어르신.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자네는 그 약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게 될걸세."
"어르신!"
진료실 문이 닫힌 뒤, 지훈은 한동안 알약을 만지작거렸다.
'자네는 그 약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게 될걸세.'
'가야할 길?.. 내가 가야하는.. 그런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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